시동이 너무 잘 걸려요
아침에 자리에 앉으면 시동 거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개발자에게 시동을 건다는 것은 에디터를 켠다는 것.
에디터를 켜기 싫어서 이 뉴스 저 뉴스 쳐다보고, 달력에 일정은 뭐가 있나 확인하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먼저 처리했습니다.
그러다 어떻게든 에디터를 열고 일을 시작하면 또 했습니다.
시작하는 게 어려웠지 일단 시동이 걸리고 나면 그럭저럭 굴러갔습니다.
그런데 최근 문득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동 거는 게 너무 쉽다.
자리에 앉아서 할 일을 한번 스윽 보고 바로 일을 시작합니다.
코드를 내가 짜지 않으니까.
클로드나 코덱스 열어서 프롬프트 몇 자 휘갈기고 가만히 기다리면 결과가 나오니까. 그것도 꽤나 근사한 결과.
더 이상 시동 거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코딩이라는 것이 지독하게 귀찮은 짓입니다.
어느 파일을 고칠지 생각하고, 코드를 쓰고, 에러를 만나고, 문서를 찾아보고, 한참 헤매다가 겨우 한 발 앞으로 전진.
그 모든 과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피곤했거든요.
시동이 잘 걸리게 된 것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불안함이 듭니다.
예전에 주식투자에 관한 글에서 인상 깊게 읽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서와 생각, 경험의 양이 부족한데도 주식투자가 즐겁다면,
장이 열리는 날이 기다려진다면,
아침 9시에 HTS를 켜고 있다면,
주가의 움직임을 오래 지켜보고 있다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힘겨운 과제(주식투자)를 해결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해결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칙센트미하이는 도박을 그 예로 들었다.
낮은 수준의 과제를 낮은 수준의 능력으로 해결하고 있을 때도 몰입은 가능하다. 컴퓨터 게임은 목표와 규칙이 명확하고 방법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쉽게 몰입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주식투자는 컴퓨터 게임이 아니다.
나는 혹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AI와 함께하는 개발은 재미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친구에게는 게임보다 더 재밌다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프로그래밍을 도박이나 게임처럼 대하게 된 건 아닐까?
슬롯머신 레버 당기듯이 프롬프트를 휘갈겨 쓰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
물론 AI가 없애준 것 중에는 분명 아무 의미 없는 고생도 많기 때문에 더 햇갈립니다.
AI 덕분에 쓸데없는 마찰이 사라진 건지, 내가 더 이상 어려운 일을 하지 않게 된 건지.
저는 그래도 요즘 세상이 좋긴 합니다.
코딩이 얼마나 하기 싫었으면 에디터 아이콘 하나 누르기가 싫어서 뉴스를 보고, 달력을 보고, 주식 시세를 보고, 온갖 딴짓을 하다가 겨우 일을 시작했을까요.
예전 동료의 비개발자 동생이 최근 바이브코딩으로 뭔가를 처음 만들어보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이런 코드들을 진짜로 한글자 한글자 다 쳐서 카톡을 만들었단말야?”
어찌나 웃음이 터지던지…
아마 원시인들처럼 생각되지 않았을까요?
절대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박이나 게임처럼 프로그래밍을 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집중하고 몰입하려 애쓰는 마음만큼은 잃고 싶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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