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블로그가 완전히 변하게 된 계기가 세 번 있었습니다.

글쓰기 생각쓰기, 봉준호, 헤밍웨이

2017년에 글쓰기 생각쓰기를 읽은 것이 첫 번째 계기였습니다.
제목도 너무 마음에 듭니다. 글쓰기 생각쓰기.

어떻게 하면 난삽함이라곤 전혀 없는 이 부러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답은 난삽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버리는 것이다.
명료한 생각이 명료한 글이 된다.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는 있을 수 없다. 생각이 흐리멍텅한 사람이 훌륭한 글을 쓰기란 불가능하다.
한두 문단은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독자는 이내 길을 잃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를 다시 불러들이기 어렵다. 글 쓰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잘못은 없다.

<글쓰기 생각쓰기> 중

명료한 생각이 명료한 글이 된다.
바로 그거군. 문장에 신경쓰기 보다 생각을 깨끗하게 하는데 집중하자.

두 번째 계기는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시상식을 바라보던 순간.
머리를 띵 맞은 것 같았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내 경험과 이야기도 재밌을 수 있겠구나.

세 번째는 헤밍웨이의 인터뷰를 읽다가.

질문자: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끊임없이 무언가 쓸 만한 것을 찾는 관찰자가 되시는군요.

헤밍웨이: 맞습니다. 만일 작가가 관찰하는 것을 멈춘다면 그는 끝장난 것이지요. 그러나 의식적으로 관찰할 필요는 없으며 관찰한 것을 어떻게 쓸 것인지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을 거예요. 그러나 나중에는 그가 관찰하는 것 모두가 그가 알고 있거나 본 것들로 이루어지는 거대한 자산이 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항상 빙산의 원칙에 근거하여 글을 쓰려고 애썼습니다. 빙산은 전체의 8분의 7이 물속에 잠겨 있지요.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안 쓰고 빼버린다 해도, 그것은 빙산의 보이지 않는 잠겨 있는 부분이 되어 빙산을 더 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작가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여 안 쓰는 것이라면 이야기에는 구멍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노인과 바다』는 1000쪽이 넘을 수도 있었습니다. 마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태어나고 교육받고 아이를 낳는지 등등의 과정을 모두 담을 수도 있었고요. 그런 것들은 이미 다른 작가들이 훌륭하고 멋지게 그렸지요. 글을 쓸 때는 이미 만족스럽게 이루어진 것에 의해 제한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작가가 하지 않은 것을 배우려고 했어요. 우선 독자에게 경험을 전달하는 데 불필요한 모든 것을 없애려고 애썼습니다. 독자가 무엇인가를 읽은 후에 그것이 그의 경험의 일부가 되고 실제로 일어났던 일처럼 여겨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아주 힘들었지만 그렇게 하려고 무척 애썼습니다.

어쨌든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건너뛰자면, 저는 그때 믿을 수 없을 만큼 운이 좋아서 그 경험을 완벽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그렇게 전달해본 적이 없는 그런 작품을 쓰게 되었지요. 그 운이란 제가 그 멋진 사람과 멋진 아이를 만났다는 것이며, 요즘 작가들이 그런 것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듯이 바다도 쓸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운이 좋았지요. 저는 청새치가 짝짓기하는 것도 봤고 거기에 대해서도 잘 알았어요. 그렇지만 그것을 그냥 내버려두었지요. 저는 50여 마리의 향유고래 떼를 본 적이 있고, 길이가 거의 20미터나 되는 놈에게 작살을 던졌다가 놓친 적도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내버려두었지요. 어촌에서 알게 된 모든 이야기들도 그냥 내버려두었어요.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이 빙산의 물속에 잠겨 있는 부분이 되었던 것이지요.

<작가란 무엇인가 1>, 파리 리뷰 - 밀리의 서재

생략해도 되는구나. 아니, 생략을 해야만 하는 거구나.
알고 있는 걸 주절주절 다 쓰지 말고 생략했을 때 오히려 더 강한 여운을 남길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이후로 글쓰기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지금의 방식이 훨씬 마음에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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